나아진게 없네

하헌진
나아진게 없네
  1. 마치 거기 있는 것 처럼
  2. 난 그댈 원해
  3. 더는 나아진게 없네
  4. 이제 떠나면
  5. volca dub
  6. 돌려 놓을 수 없으리
  7. 그댄 날 떠나지 마오

새로운, 새로이, 새롭게 하헌진

음원 사이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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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헌진의 이름과 음악엔 언제나 장르가 따라붙었다. 블루스, 블루스 맨, 델타 블루스. 그것이 얼마나 그를 가뒀는지 정확히 가늠할 순 없지만, 이제 적어도 '델타'라는 말 정도는 떨쳐내도 될 때가 온 게 아닐까. 신보 [나아진게 없네]에선 그보단 일렉트로, 뉴웨이브, 혹은 그저 누(Nu)나 네오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명확한 지역이나 장르보단 스타일, 사운드, 혹은 태도나 지향점을 얘기할 때 더욱 알맞게 들리는 표현들이다.
 

울림 좋은 보컬과 느긋한 아르페지오 대신 반복되는 기타 루프, 드럼 머신, 신시사이저와 알 수 없는 효과음을 비롯해 명백히 아날로그 악기를 지향하는 소리. 전작들이 계절처럼 다른 '무드'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헌진의 목소리와 기타 연주에 집중하게 됐다면, [나아진게 없네]에서 주목하게 되는 건 기타든 드럼이든 거기서 나오는 리듬이다. 그리고 하헌진은 적어도 자신의 독집 음반을 만들 때 만큼은 언제나 그랬듯, 홀로 자신의 리듬을 구축하는 데 몰두한 듯 보인다. 모든 악기를 직접 녹음하고 믹싱까지도 스스로 해결했다. 일렉트로 블루스의 색이 꽤 드러났던 <제비다방 컴필레이션 2015>의 '나를 내몰지마오'와 지난해 5월 발매한 싱글 '다시 날 받아주었네'와도 차이가 있다.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신덕호의 디자인 정도일까.
 

그런데 그 디자인조차도 음반을 한 바퀴 돌려 들은 후엔 좀 다르다는 인상이 들고야 만다. '그루브'에 몰두하다 놓친 가사를 정확히 읽고자(전에는 결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다.) 새빨갛고 장식이 적은 카세트테이프의 커버를 쫙 펼치며 떠오른 음반은, 엉뚱하게도 역시 새빨간 토킹 헤즈의 [Talking Heads: 77]과 갱 오브 포의 [Entertainment!]였다. 포스트 펑크와 뉴웨이브. 그 빨간 깃발 같은 두 장의 음반. 펑크 이후의 어떤 음악에 붙이는 수사로서의 포스트, 그리고 그 뜻 그대로 어쨌든 새로운 음악이란 의미의 뉴웨이브(후에 장르로 고착화됐지만). 하헌진은 남들의 펑크가 아닌 자신의 전작들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고자 전자 악기를 들고 합주실 대신 다시 혼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싼 값에 대단한 연주력이 없어도 온갖 소리를 다 낼 수 있던 신문물, 전자 악기를 처음 마주한 여느 당시의 뮤지션들이 그랬듯.
 

물론 “하오, 하리, 하네”로 끝나는 문장을 쓰고, 좀 마이크에 멀리 떨어져 노래하는 것 같고, 그대와 나에 대한 노래를 1인칭 시점으로 부르는 하헌진은 그대로다. “이제는 함께할 친구가 생겼다”더니 이윽고 “내 방에 침대가 생겼다”며 기뻐하던 하헌진은 그때로부터 3년쯤 지난 지금, “더는 나아진게 없다”며 더 나은(혹은 또 다른) 음악에 열중했을 뿐이다. 신보의 노랫말이 한 곡씩 바짝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꿈틀대던 전작 [오]에 비해 한결 흐리게 들리는 건, 음반의 기승전결 확실한 흐름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거기 있는 것처럼 난 그댈 원해. 더는 나아진게 없네. 이제 떠나면 돌려놓을 수 없으리.” 마지막 곡을 제외하고 모든 제목을 이으면 이런 삭막한 구절이 완성된다. 그리고 약 10여초 간의 무음 공백 뒤 나오는 '그댄 날 떠나지 마오'. 예의 덤덤한 목소리와 단출한 어쿠스틱 기타. 하지만 애원이나 통사정이라기보단, 달라진 모습에 실망도 기대도 하지 말라는 굳건한 의사 표현에 가까워 보인다. 펑크란 그렇게 자기를 바로 세우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글/ 유지성(GQ KOREA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