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는 물건>의 재발매에 부치는 회고록

이주호

<파는 물건>의 재발매에 부치는 깜악귀의 회고록

- 걸작 혹은 괴작 혹은 망작의 사이에서

눈뜨고코베인의 EP <파는 물건>의 재발매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무려 9년만의 재발매로서 그동안 희귀본이었던 이 재발매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눈코의 보컬인 깜악귀가 이 2003년에 발표된 앨범 제작 당시의 상황을 회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3년 당시의 눈뜨고코베인 멤버들. 지금까지 단 한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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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는 물건>. 이 이름의 EP를 재발매하자는 이야기는 밴드 2집의 유통사 파고뮤직의 손관호 사장님에게서 처음 나왔다. 하지만 당시에는 3집의 작업에 착수한 참이었고 과연 이놈의 앨범이 출시될 수나 있을지 의구심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따라서 2010년에 나왔던 이 이슈는 그냥 잊혀지고 말았다.


사실 나는 앨범을 하나 준비할 때마다 ‘이 앨범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휩싸이곤 한다. 그건 2집 이후부터 생긴 증상이고, 이후 앨범 하나를 만들 때마다 타이어를 끌고 산등성이를 오르는 사람처럼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하곤 했다. 우리 밴드의 앨범 녹음을 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데모와 최종본의 차이가 상당하다. 러프한 스케치에 가까운 데모를 들을 만하게 만드는 데 가능한 조합을 다 시험해보는 정말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시에는 그짓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우울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재발매를 생각할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3집을 내고 나서 좀 홀가분해지자 다시 이 이슈는 떠올랐다. 이제 딴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손사장님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합의를 거쳐 붕가붕가 레이블에서 재발매를 내게 되었다. 사실 이 <파는 물건>은 붕가붕가에서 나온 앨범은 아니지만 초기의 붕가붕가 레코드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큰 앨범이다. 그래서 붕가붕가 레코드에서 출시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일단 이것은 그 당시 우리들의 느슨한 음악적 공동체 - 그러니까 눈뜨고코베인과 그 외의 멤버 곰사장, 윤덕원, 이기타 등으로 이루어진 - 에서 최초로 ‘외부를 향해’ 제작된 앨범이었다.


그 전에도 앨범은 만들어봤지만 그 앨범들은 모 대학 내부를 타겟으로 한 일종의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다. 그건 <밴드밴드짠짠>(일명 ‘뺀짠’)이라고 하는 시리즈 타이틀을 달고 있었는데 당시 슬프니와 나는 제 1호의 뺀짠 앨범을 제작하고 나름 노하우를 알겠다 싶은 참이었다. 이 당시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서적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을 펴보면 될 것이다.

이후 우리는 그 사업을 곰사장에게 인계하고 눈뜨고코베인에 몰두했다. 위의 책에도 나오지만 이 밴드는 그 공동체에서 홍대를 향했던 최초의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노하우를 가지고 이 밴드의 음악으로 ‘최초의 외향적 앨범’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바로 자체제작으로. 그 산물이 바로 우리의 최초 앨범이자 EP <파는 물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무모한 시도였지만 우리는 ‘좋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낼 생각은 별로 없었다. 일단 그동안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슈어57, 58 마이크만 가지고 녹음했을 때 어느 정도의 소리가 나오는지 이미 알고 있기도 했다. ‘대단한 소리는 안 나오지만 그래도 못 들을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더구나 구상 당시에는 ‘데모’를 만들어볼 생각이었지 무슨 정식 출시본을 낼 생각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안해보던 짓을 해본다는 것만으로 신이 났다!

바로 연습실에 PC를 가져다놓고 녹음을 시작했다. 기억하기로는 약 반년 정도고 소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 우리는 클럽 재머스 등에서 ‘그대는 냉장고’ ‘영국으로 가는 샘이’ ‘누나야’ ‘그자식 사랑했네’를 위시해서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 등 이 EP에 실린 다섯 곡을 자주 플레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1집에 실린 곡들도 몇 개 있었고 이미 자작곡은 꽤 되는 상태였다. 이미 그때 2집에 실리게 되는 ‘횟집에서’도 연주하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면 왜 저 다섯 곡을 선택했는가.

우리는 ‘밴드의 명함’이 될 데모 앨범을 만든다고 생각했으므로 밴드가 낼 수 있는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자식 사랑했네 - 모던록
영국으로 가는 샘이 - 하드록
그대는 냉장고 - 펑크
누나야 - 사이키델릭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 - 펑크

이렇게 다 장르적 색채가 다르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에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로 펑크가 두 번 중복되는 것은 옥의 티지만 거기에도 이유가 있다. 우리 생각에 ‘그자식 사랑했네’는 꽤나 대중적이었지만 ‘누나야’나 다른 곡들은 좀 ‘하드’했다. 그래도 밴드의 데모라면 밴드의 대중적인 면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러자면 대중적인 곡이 두 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외로운 것이 외로운 거지’를 녹음하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시 눈코의 공연사진.

     '코베였다'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코에 밴드를 붙이고 있다..  



** 조금은 무모한 녹음에 착수하다

좌우간 그렇게 녹음이 이루어졌다. 보컬은 연리목의 지적에 의하면 ‘음정이 너무 자주 나가는’ 기술적 미달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필 하나는 충만했다. 나는 그 때는 ‘목을 학대할수록 더 좋은 소리’라고 믿고 있었다. 즉 편한 소리를 좀 싫어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편한 소리가 남도 편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면도 생겼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몇 년 후 나는 이자람에게 ‘사람들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보다는 벙어리가 노래하는 것을 더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후자가 더 진실될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자람은 이 문장에서 ‘벙어리 여가수’라는 노래를 만드는데...) 뭔가 좀 닭살돋는 멘트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 나의 보컬에 대한 철학을 요약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러니 ‘영국으로 가는 샘이’나 ‘누나야’ 등에서 내가 지르는 괴성은 그런 범주에서 이해해주어야 한다. 자 나의 ‘벙어리짓’을 들어보라...

우리는 웰메이드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남들 다 하는 식의 잘 만든 음악을 하려면 이 밴드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냉장고의 기타 라인 중 하나는 연습용의 자그마한 앰프를 써서 녹음한 것이다. 일반적인 앰프 소리가 너무 ‘평범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 앰프에서는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고 그렇게 녹음한 소리는 ‘그대는 냉장고’의 전주 리프에 담겨져 있다. 우리는 그 소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열라 좋은데...?”

좀 웃기는 것 중 하나는 당시 우리는 이런 짓들을 하고도 ‘우리는 대중적이다’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후 우리의 정규 1집 제목이 <Pop to The People>가 된 것은 절대 키치적인 컨셉이 아니었다. 이걸 키치컨셉이라고 단정하는 평론가들을 보면 나중에도 짜증이 밀려오곤 했다. (내가 아니라도 해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로 팝을 만들려고 했다. 다만 남들이 안 하는 팝을. “이런 것도 팝이 될 수 있어요. 왜 안 되나요?” 그런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마인드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보자. 이 앨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게 조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때의 우리는 웰메이드한 팝을 어느 정도 혐오하고 있었다. 이 증세는 밴드 멤버 중 내가 가장 심했고 기하가 가장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같이 밴드를 하고 의견 교환을 하면서 어느 정도 공통적인 멘탈리티가 공유되었다. 특히 혐오하는 노래는 “뻔하고 잘 만든 노래”였다. 특히 ‘누가 만들어도 상관없는 그런 식의 잘 만든 노래’를 가장 싫어했다.  

나중에 기하가 솔로 독립 후 ‘다른 사람이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노래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는 걸 봤는데 이는 곧 우리 밴드가 공유한 이념이기도 했다. 우리의 생각에는 못 만들었더라도 비슷하지 않은 걸 만드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클럽에 서는 밴드 중에 우리가 젤 뛰어나다고 믿었고 이점에 대해서는 깊이 양해를 구한다. 우린 술자리에서 정말 진지하게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젤 낫던데...” 물론 다른 밴드를 쓸데없이 폄하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의 장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적 기준에는 우리가 최고였다.

내 생각에 이것은 어떤 밴드의 최소한의 존재 근거인 것 같다. ‘세상에는 여러 밴드가 있고 여러 음악적 기준이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음악적 기준에선 그들이 최고라고 자신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한다“ 당시 내가 혹은 우리가 했던 생각과 음악에 대한 사고관은 지금 돌아봐도 전적으로 정당하다. 다만 우리가 뭘 모르는 철 없는 애들이었다는 것도 사실인데 그거야 뭐 어떤가.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뭘 좀 몰랐으면 좋겠다. 뭘 모른다는 것은 좋은 것이며 우리 모두는 뭘 좀 모를 필요가 있다. 잘난 체 하며 알려주려는 이가 있으면 항문을 걷어차버리기 바란다. ”내가 좀 모르도록 내버려둬 달라고!“하고 말이다.

하여튼 우리의 녹음은 그런 마인드로 이루어졌다. 기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기술적인 부분은 전혀 몰랐는데 내가 음악에서 할 줄 아는 건 소리지르고 기타 코드를 잡는 것 뿐이었다. 모든 엔지니어링은 목말라가 전담했다.

드럼 녹음에서 마이킹은 양 옆의 상단에 오버헤드 두 개를 대어 전체적인 드럼 사운드를 받고 킥에 하나를 대었다. 그 외 하나쯤 더 쓰이거나 말거나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약 두트랙 혹은 세트랙 정도의 사운드를 받아서 믹싱. 기타 앰프는 아마도 오렌지 앰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녹음 환경은 물론 우리의 지하 연습실. 봉천동 쑥고개의 연습실은 내가 ‘중력백만배’라고 이름 붙인 곳이었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딴 이름이었다.


** 결과물을 앨범으로 만들다

약 반년이 흘러 총체적인 치기와 용기의 결과물인 이 <파는 물건>은 결국 제작 완료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밴드의 음악을 녹음해보는 꿀맛을 보았다. 말했다시피 처음부터 이걸 ‘출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강 믹싱해서 오디오로 들어보니 은근히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오오.. 은근히 그럭저럭 멀쩡한 음악으로 들리잖아?”

기하의 말이었다. 당시 우리 중에 운전을 할 수 있는 건 기하였고 기하가 자기 부모님의 차를 몰고 우리를 실어 나르곤 했다. 그래서 그 차의 카스테레오로 이런 저런 음악을 같이 많이 듣던 시절이었다. 송골매와 산울림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홍대와 서양의 인디록들. 바로 우리의 음악관이 결정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였다.

하여튼 산울림이나 밥 말리, 도시락 특공대 등이 나오던 스테레오에서 우리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의 감동은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무대는 아니라도 어쨌거나 같은 전자회로에서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뭔가 내노라하는 뮤지션들과 같은 반열에 선 것 같은 기분. 목말라 슬프니 연리목 기하 그리고 나는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음악을 개 못하진 않는군...
-상당히 개성감 있게 들리는데...
-심지어 음질이 안 좋은 것마저도 나름의 작품의 일부라고 여겨져...

출산한 아이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숨이 넘어가는 산모의 기분이 그랬겠지. 그래서 우리는 이걸 단순한 데모로 놓기 보다는 아예 EP로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앨범 커버는 ‘아는 누나’인 이샤가 맡아주었고 우리는 반투명한 비닐 우비를 입고 커버 앨범용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누가 잡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대낮에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들고 있는 그 커버 사진이 완성되었다. 이걸 두고 또 “이 커버의 의도가 뭐냐”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흠.. 당신은 의도가 있어서 사는가? 의도가 있어서 사랑하는가? 의도가 있어서 밥을 먹는가? 당신이 오늘 카레밥을 먹은 것은 단순히 그게 먹고 싶었거나 그래서가 아닌가? 곡을 만들고 커버 사진을 찍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술의 모든 디테일에는 의도가 있다고 믿는 태도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멘탈리티 중 하나다.

말이 헛나가는데, 하여튼 우리는 그냥 그 커버를 찍었다. 왠지 그게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결정을 파고들어보면 어떤 세밀한 논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곰곰이 생각하는 악취미는 별로 없으니까. 밴드 이름을 정할 때처럼 ‘이거 어때?’ ‘오오, 그거 좋겠는데!’ 뭐 그런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약간 그리스적인 분위기가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다만 참 특이한 애들로 보이긴 했다. 우리가 원하는 바였다....

이 앨범의 그 속지에는 슬프니가 풀을 뜯어먹고 기하가 기중기처럼 차를 들어올리려고 하고 연리목이... 기타 등등의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이건 커버 촬영하고 남은 시간에 그냥 재미로 찍은 건데 앨범 속지에 실렸다. 나중엔 좀 후회하긴 했다. 뭐, 록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뭐에서 자유로울 것인가? 상관없다. 하지만 그 사진들은 안 실었으면 좋았을 걸..

아, <파는 물건>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었는가?

나중에 평론가인 신현준씨가 “김창완의 인터뷰 중에서 영향받은 것 아니냐”라고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렇기도 한 것 같다. 김창완씨는 산울림 1집이 나왔을 당시 자신의 내밀한 감성이 정육점의 고기처럼 진열된 것에 어떤 기묘한, 부끄러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고 어느 인터뷰에인가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말이 상당히 기억에 남았었다.

한편으로 나는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식의 이중적 자기 지칭의 느낌이 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치기어린 발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 앨범은 우리가 만든 최초의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이므로 앨범 제목도 ‘파는 물건’인 것이다.

나는 그래서 커버에 액자가 있고 그 액자 안에 이 앨범 커버가 또 들어있기를 원했는데.. 디자인을 해준 누나는 열심히 그 의도를 수용하려고 했지만 사실 시각적으로 쉽지 않은 컨셉이었고 그래서 상품처럼 ‘도장’을 찍는 것으로 의도를 대신했다. 그래서 앨범에는 정육점의 돼지고기처럼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그리고 밑에는 회화의 제목처럼 앨범의 제목과 연도가 작게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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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 유통, 배포하기

프레스와 마스터링은 슬프니가 알아다주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마스터링을 후딱 해주었고 (난 누군지도 모른다) 우리는 500장의 CD를 받았다. 자 이제 이것을 팔아야했다. 우리는 향뮤직과 퍼플 레코드에 우리 앨범을 거래했는데 이 두 곳은 그래도 독립 인디 뮤지션의 앨범을 잘 받아주던 곳이었다. (나중에는 향뮤직으로만 일원화했다)

그리고 또 밴드 홈페이지에서도 앨범을 판매했다. 판매부장은 연리목이 맡았는데 게시판의 쪽지와 이메일로 구매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밴드 통장으로 돈을 입금했고 그러면 연리목이 앨범을 포장해서 우체국에서 발송했다. 요즘 인디밴드라는 말은 너무나도 흔해졌고 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 되어가고 있지만 사실 전통적인 정의에서 ‘인디’라는 말은 ‘독립성’과 ‘자주성’이핵심이다. 자체 제작, 자체 유통을 해야만 인디밴드라는 건 아니지만 그걸 할 수 있는 마인드를 지녀야 인디 밴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 때는 우리는 막 인디 밴드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밴드 멤버들은 모두 제각기의 역할을 맡아 밴드를 굴려갔다. 우리는 모두 차량을 감당하는 타이어 같았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파는 물건>은 잘 팔렸다. 500장을 파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인건비와 프레스비 빼고는 제작비가 들지 않았으므로 수익은 전부 밴드 통장으로 들어갔다. 오천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팔았지만 (배송료 합하면 약 7000원) 나름 쏠쏠했다고 기억된다. 당시 우리는 행사 같은 걸 뛰진 않았지만 200만원이 넘는 금액을 통장에 모을 수 있었다. 직접 유통이라는 건 이런 게 좋은 것이다. 만국의 인디 밴드여, 레이블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레이블은 보조자일 뿐이다.

하여튼 이후 우리는 비트볼 레코드와 인연을 맺고 정규 1집을 제작하게 되고 그 와중에 이 앨범은 추가 제작 없이 절판시켰다. 직접 유통하는 게 은근히 귀찮았던 데다가 그 정도 퀄리티의 앨범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 앨범의 숫자는, 아직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약 480장 정도 될 것이다. 숫자로 보아도 희귀본이다. 그래서 이 앨범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재발매’ 자체를 환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재발매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원판’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을 것 같다. 어디까지나 원판은 원판인 것이다.

나는 나중에도 계속 내심 <파는 물건>은 걸작이라고 믿었다. 물론 ‘음악적’으로 혹평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 자신조차도 가차없는 비판을 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앨범은 그런 비판이 별로 잘 들어먹히는 앨범이 아니다. 애당초 그런 걸 자랑하려고 만든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송라이팅이나 여러 면에서 이후의 앨범보다 떨어지는 면이 있을지 몰라도, 이 앨범에는 ‘우리 나름의 록 스피릿’이 가득 들어 있고 또 그것이 가장 덜 포장된 형태로 담겨 있다. 지금이라면 그것을 포장하고야 말겠지만 이 때는 당연한 듯이 그러지 않았다.

이 앨범에 담겨 있는 음악은 생고기를 그냥 구운 그런 형태의 요리와 같다. 심지어 좀 덜 구워져서 핏물이 씹히기도 한다. 여기에는 도전이 있고 꿈이 있으며 사회적 기성 가치에 대한 무관심함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앨범을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눈코의 모든 앨범 중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지구상 최후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파는 물건>에는 음악 외적인 가치가 약간 있기도 하다. 이걸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또 언급하지 않기도 어렵다. 이 앨범은 ‘당시 우리 공동체(scean)' 최초의 도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후 우리와 그 나물에 그 밥인 멤버들로 이루어진 붕가붕가 레코드의 최초 앨범들 역시 이 합주실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녹음되었다. 이후 <브로콜리 너마저>가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의 앨범을 녹음했다. 그렇게 보면 <파는 물건>은 일련의 스트림을 반영하는 최초의 앨범이었다.
 
<파는 물건>은 우리 밴드의 발생학적 기원을 증언한다. 또한 이 앨범은 이후에 등장할 많은 음악적 흐름을 ‘증언’하고 ‘예감’하기도 한다. 우리도 모르게 담긴 시대성이라는 놈이 조금 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다섯 곡 사이에는 행간에 그렇게 오밀조밀한 놈들이 들어 있다. 이것을 다시 듣는 분들이 그걸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2년 02월 23일. 눈뜨고코베인 보컬 깜악귀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26탄

눈뜨고코베인 + 몸과마음 합동 콘서트 "대만원"
2011.04.01(일) 18:30 @ 상상마당 Live Hall
예매 10,000 / 현매 20,000
출연진: 눈뜨고코베인, 몸과마음
초대손님: 얄개들

예매 오픈: 02.13(월) 낮 12:00
예매처: 온오프믹스 (www.onoffmix.com) 바로 가기

문의: 이메일 show@bgbg.co.kr
트위터 @BGBGrecord
주관: 붕가붕가레코드 / 주최: 두루두루AMC